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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2
현대, 즉 요즘 천문학자들은 아주아주 큰 망원경에다 접안렌즈를 이용해서 관측하는 일이 별로 없다. 기술이 발전한 요즘은 CCD 카메라를 이용해서 천제의 스펙트럼을 기록하거나 사진을 찍는다. 요즘은 옛날처럼 아주 많은 시간을 천문대에서 보내지 않고 1년에 1~2주 정도를 본인이 직접 관측을 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얻은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한다. 반면에 자료를 얻지 않고 이론이나 수치를 가지고 실험을 이용해서 현상들을 해석한다.
천문학자 2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의 업적으로는 운동법칙을 정립하고 망원경을 개량해서 관측하고,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통해서 태양계는 태양이 중심이지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아주 많은 반대가 있기에 스스로 자진해서 로마 교황청을 갔으나 종교재판에 불러들여졌고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지구는 돈다.라는 명언을 남긴 인물이다. 이를 볼 때 혹시 그가 종교계와 대립을 하는 것인가 싶지만 그는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였다. 그런 대립은 본인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쌍안경을 사용하여 천체극 관측하고, 그를 통해서 다양한 천문학적인 발견을 해냈다.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달의 크레이터와 산맥, 명랑이라 불리는 달의 고지대와 달의 균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또한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고 현재는 갈릴레오 위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발견들은 당시의 천문학적 모델을 뒤흔들었고, 특히 지구 중심의 우주적 모델에 도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갈릴레오는 또한 기울어진 평면에 물체가 같은 속도로 자유낙하한다는 실험을 통해서 중력의 개념을 입증했다. 그리고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을 했다. 그의 연구와 실험은 과학적 방법을 강조하고 , 직접적인 실험과 관측을 통해서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수학에도 많은 업적을 세웠다. 그중에 갈릴레오 역설이라고 있는데, 이 역설은 완벽한 제곱수가 되는 숫자들은 전체 자연수의 일부인데, 모든 숫자는 제곱수의 근이 될 수 있으니 개수는 전체 자연수의 개수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게오르크 칸토어가 증명하기까지 250년 동안 유지되었다. 천문학에서는 망원경을 만들어내었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30 배율 망원경도 개발해 냈다. 이를 통해서 정확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지구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천문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역업과 무역과 관련된 일들에서 잘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들이 측선을 제작해 달라고 했고 그래서 그는 개발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세 개 별 모두 목성에서 쭉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1월 10일 어느 날 갈릴레이는 그 별 중 한 개가 사라졌음을 말해고, 관측을 이용해서 그 별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한 곳에 정지한 것이 아니고 그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나중에 갈릴레이 위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갈릴레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18개월에 걸쳐서 위성, 별들을 관찰했고 이 별들의 주기에 대해 말하는 케플러가 맞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토성도 관측하고 관찰했고, 처음에는 토성의 고리가 3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는 토성의 고리는 지구랑 나란히 있었고, 2개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고리가 나타나서 그는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달의 표면을 관찰해서 그달의 표면 위에는 빛과 그림자가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달에는 분화구와 산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무엇까지 말했냐면 산의 높이를 통해서 분화구와 산들의 크기나 높이를 계산해 냈다. 그래서 달은 완벽한 구의 모양이 아닌 지구처럼 거칠고 또한 편평하지 않다는 결론까지 끌어냈다. 그는 달만 아니라 불투명하다고 여겨졌다는 은하수를 관측하고 다수의 별 무리를 발견했다. 갈릴레이는 1612년 해왕성도 발견했지만 무엇인지 몰라서 딱히 특별하다고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많은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중심으로 지동설을 주장했고, 동시대 물리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지지해 주었기에 많은 비판,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비판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케플러는 무시했고, 그의 업적이 관심도 가지지 않고 자신이 최고라 알고 있었다.
갈릴레이의 종교
교황청은 갈릴레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종교의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업적이 나와도 좋게 좋게 여러 차례 철회를 요구했으나 갈릴레이는 불러들여질 때까지 그는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면서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는 오래가지 않았고 재판을 받고 나서는 주장을 철회해 버렸다. 종교 입장에서는 구약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을 바탕으로 갈릴레오를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지동설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 지동설을 갈릴레이가 접한 것은 니콜라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접하고서 그의 이론의 탁월함에 감탄하여 그의 이론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때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그랬기에 겸사겸사 지동설에 대한 주장을 철회한 것이다. 그 당시 교황청에 있는 높은 신분을 가진 자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대립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교황청이랑 약속을 했다. 원래는 유죄판결받고서 끌려갈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과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서 가택에 갇히는 것으로 협의를 보았다. 그래도 지구는 돈 달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